20일 저녁, 이태원 자택에서 체취를 느끼며 하룻밤을 지내었고, 21일 서울추모공원에서 하늘로 가는 모습을 보았지만,
오늘 밤, 아니 어쩌면 내일 밤 자정을 지나는 시간 “고 회장 늦게 전화한 것 아니요“. 하며 전화가 올 것 같기도 하다.
‘워싱턴타임스재단’ 양창식 이사장은 추모사(대독)에서,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가 논한 ‘민주화 이전에 먼저 가난을 해결할 산업화를 추진해야 한다’라는 말을 인용하며 보릿고개를 넘지 못한 1960년대, 조국의 부름에 대한민국을 도왔지만 끝내 성숙하지 못한 정치계 희생양이 되셨다. 하면서 당시 재벌의 아들이자 초엘리트 청년이 무슨 돈이 필요하여 로비스트의 길을 걸었겠냐. 반문, 재조명되어야 한다고 했다.
회장님은 1935년 평안남도 순천에서 태어났다. 배재고를 다니던 1952년 도미, 에디슨하이스쿨을 거쳐 1955년 조지타운대학교 입학, 학생회장을 하였고 1959년 졸업하였다. 스물여섯 나이인 1960년 워싱턴에서 한선기업 창업, 1965년 미국 영주권 취득, 1966년 오늘날 세계적 사교클럽이 된 조지타운클럽을 설립하면서 조국의 근대화를 도왔다.
이름도 모르는 아프리카 신생국가 젊은이가 혈혈단신 서울에 와서 명문대학교 입학, 학생회장이 되고 스물여섯 나이에 기업창업, 서른두 살에 한국의 지도자 자녀들을 모아 사교클럽을 만들었다. 한다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 할 것이다.
하지만 회장님 삶의 여정은 팩트다.
1975년 뉴욕의 한남체인을 인수 합병한 한남체인그룹 회장, 미륭그룹 회장, 숭의학원 이사장, 한국빙상협회 회장, 한국蘭협회 회장, 한국茶인연합회 이사장, 유엔사무총장 고문, 조지타운클럽 명예회장, 파킹톤 회장, 근년에는 한국당뇨협회 회장, 청산포럼 회장 등 여러 직함이 있지만 가장 좋아하시는 닉네임은 차인 또는 민간외교관이다.
김성진 문공부장관 부탁으로 전국 공예품경진대회 수상작품 전부를 구매해준바 그 격려금을 종잣돈으로 해서 오늘날 한국의 최고 장인이 된 김성수 옻칠장이나 박찬수 목공예가 이야기, 간경화로 고생하던 박수근 화백에게 당시 집 한 채 값인 25만환을 조건 없이 후원하였더니 박 화백이 고마움의 표시로 리어카에 그림을 가득 싣고 와 회장님께 드린 가슴 뭉클한 일화, 해남 대흥사의 일지암 복원과 한국 최초 차잡지인 다원지 발행을 후원하였던 이야기도 있다.
정부의 부탁이었던, 쌀수입에 관한 정확한 내용, 원자력 발전의 기반을 위하였던 일, 카트 대통령의 주한미군 철수론 때의 역할, IMF 외환위기와 전작권 연기에 관한 스토리, 유엔사무총장 선거와 국제해사기구 사무총장 선거를 도왔던 이야기, 팔순 중반의 연세임에도 한일 냉각을 풀기 위하여 노력하였던 첨예의 인맥 외교나 천궁-Ⅱ를 위하여 수차례 아랍에미리트를 다녀왔던 활동, 국가간 우애를 위하여 주한 외교사절들을 가족처럼 돌보았던 민간외교는 왜 보도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이런 이야기도 있다.
필자는 2012년 12월, 중국 인민출판사 부탁을 받아 역사 이래 전무후무할 박근혜 대통령 전기 중국어 번역출판에 참여하였다. 2013년 3월 20일 북경 주중한국문화원에서 출판식을 하면서 회장님을 모시고 갔다. 그 자리에는 인민출판사 사장을 비롯 한중 30여 곳 언론사 기자들이 있었고 이규형 주중 한국대사, 중국의 쉬부 북핵6자 차석대사, 심정창 북경대학 한국연구센터장 등 약 100여명 함께했다.
회장님께서 박 대통령과의 과거 인연을 소개하며 한중관계가 잘되면 좋겠다. 라는 통상적 축사를 하였는데 3월 23일자 한계례 신문에, 코리아 게이트 박동선, ‘박근혜 중국어판 자서전’ 출판기념회에서 박 대통령 찬양, 박정희 지시로 미 정치인들에 뇌물 뿌린 인물! 이란 제호와 함께 황당한 보도가 나왔다.
‘박근혜 인생’이라는 제목의 전기는 박근혜 자서전으로 둔갑 되었고, 『이 책은 한국차문화연합회장 고성배 선생의 노력으로.. 』 이라는 서문도 읽어보지 아니했는지 본 건과 아무 관계없는 한국차문화협회를 들먹이고, 회장님은 그 단체 이사장도 아닌데 이사장 자격으로 행사에 참석했다. 고 허위 보도를 했다.
한국의 대통령 자서전 번역출판도 잘 허용하지 않은 인민출판사가 필자에게 8% 인쇄비를 어떻게 지급하게 되었는지, 책의 내용은 어떠한지, 축사자들은 어떠한 한중관계를 원하였는지, 행사장에서 한국의 다례를 발표했는데 그 의미는 무엇인지? 보도용 자료가 차고 넘치는데도 말이다.
”제가 괜히 북경으로 가시자 했네요.” 하였더니 “괜찮소. 큰일을 하다 보면 더한 불편한 이야기도 듣게 될 터이니 신경 쓰지말고, 앞으로도 내가 필요하면 이야기하세요“ 하셨다.
위안부 문제와 강제징용 건으로 한일관계가 극으로 치닫던 2018년 8월 1일 일본에서 니카이 도시히로 자민당 간사장(당시 중의원 12선)이 200여 명 계파 국회의원과 지방의원 등을 이끌고 서울로 2박 3일 수련회를 나왔다. 일본 중진 국회의원들과 기념촬영을 하는 과정,
“나는 자주 만나지만 고 회장은 그러하지 아니하니 간사장 옆에 앉으세요” 하시면서 자리를 권하기에 ”아닙니다“ 하며 필자는 피하고, 회장님은 권하고.. 니카이 간사장이 자리에 앉지 못하고 주춤하던 일이 생각난다.
얼마나 후배를 아끼고 배려하는 성품의 소유자이신가.
경상남도와 창원시에서 예산을 지원받아 차문화 유네스코 공동등재라는 주제를 두고 10개국(현장 8, 영상2) 참여하는 ‘세계차문화산업학술대회(2023.5.13.~5.16)를 창원컨벤션에서 개최하였다. 차문화史 최초의 10개국 대회였다.
세계적인 인사의 축사가 있으면 좋을 것 같아 부탁드렸더니, 미국 찰스랭글 전 의원(하원 23선)과 일본 스즈키 무네오 참의원(중의원 8선, 참의원 2선)께 축하 영상을 받아주셨다.
찰스랭글 의원은
세계차문화산업학술대회를 후원하는 나의 친구 박동선님과 여러분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게 되어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차는 우리 모두 알다시피, 물 다음으로 세계에서 가장 인기있는 음료입니다. 따뜻함과 사랑,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맛의 느낌, 그리고 차의 표현 등과 관련된 모든 것들이 어떻게 하나가 되는지..
정말로 차는 훌륭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당신이 세상에 주는 아주 큰 선물입니다.
우리가 겪고 있는 혼란 속에서, 저는 세계의 차 애호가들이 함께 모여 차의 미래를 논하고 부모에게 사랑과 차를 선물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한 차문화 운동은 전쟁의 스트레스와 긴장과 의견 충돌도 끝을 낼 수가 있을 것입니다.
훌륭한 대회를 개최하면서 여러분 자신과 국가, 그리고 세계를 위하여 노력하시는 위대한 일에 제가 작은 일부가 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찰스 의원님은 1930년생이니 95세다. 6.25 참전용사다. 1분 40초밖에 되지 않은 짧은 축하 영상이었지만 우리 차인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였다.
1960년대 우리의 국민 개인소득은 100달러대이었다. 1970년도에도 255달러밖에 되지 않았다. 굶주린 근대사를 잊을 수 없다보니 이병철, 정주영 회장을 잊지 못하듯 패스포트를 바꾸지 아니한 애국자 박동선 회장님을 잊지 못할 것이다.
‘대한민국 茶人葬’으로 하였다면 하늘나라 가시는데 조금은 더 편하셨을 것이고 나 역시 마음의 짐을 덜 수 있었을 것인데, 조카분들의 가족장 주장과 茶도 한잔 못 올리게 하는 장례 절차를 따라야만 했던 나약함의 울화통이 언제 가라앉게 될지 모르겠다.
박동선 이사장님은 지병으로 인해 상태가 악화되면서 서울 용산구 한남동 순천향대학교 부속 서울병원에 입원해 있던 중 2024년 9월 19일 별세하셨다.
장례식장: 순천향대학교 장례식장 2층 특5호실
박동선 이사장님은 차의 선구자로서 1979년 1월 20일 한국 차인회가 출범했을 때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발기인: 박종한, 김미희, 박태영
고문 추대: 최범술(효당스님), 안광석, 이방자, 박동선
한국차인회가 결성되고 첫 사업으로 진행한 것이 초의선사가 거쳐 했던 해남 대흥사의 일지암복원 사업이었다. 일지암 복원 추진위원회가 결성되고 1980년 4월 15일 복원되었다.
아인 박종한 선생님은 생전에 이 당시 박동선 선생님의 역할이 중요했다고 늘 말씀하셨는데, 이제 차의 선구자들은 모두 별세하셨다.
- 19일 박동선 이사장님의 언론 보도는 다음과 같다 -
박동선 씨는 1970년대 박정희 정권 당시 한·미 외교 관계에 큰 파장을 일으킨 ‘코리아 게이트’ 사건의 핵심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2024년 9월 19일, 89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코리아 게이트 사건은 1976년 10월 24일, 미국 워싱턴포스트의 보도로 세상에 알려졌다. 이 보도에 따르면, 박동선 씨는 한국 정부의 지시에 따라 미국 국회의원과 공직자들에게 연간 50만 달러에서 100만 달러 상당의 현금을 전달하는 로비 활동을 벌였다고 하며, 이 사건은 당시 한·미 외교 관계에 큰 마찰을 일으켰다.
여기 올린 당삼채唐三彩 인형人形. 익살스러운 몸짓에 서로의 표정은 대조적이지만 정감 어린 두 악사樂士의 모습에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자기들 만의 즐거움과 생동감이 넘쳐난다. 실제 크기는 손가락 한 마디에 불과한 작고 앙증맞은 토용土俑.
또한 시대와 출신지는 서로 달라도 각양 각색의 포즈로 살아남은 이 완구玩具들 역시 이제 다시는 더 구할 수도 없고 만날 수도 없는 희귀한 출토품들이다.
나는 예술품의 가치를 사고 파는 가격만으로 평가할 순 없다고 늘 생각 해 온 사람이다. 문론 훌륭한 작품은 비싸기 마련이고, 값비싼 작품이 신통 챦을리는 없다. 그러나 예외도 있다. 도자기든, 그림이든, 민속품이든 순수 무구한 아름다움이 베어있다면 값을 떠나 늘 곁에두고 싶어지는게 사람의 마음 이다.
마치 남이 볼땐 별것 아닐지라도 내게는 그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자식 같은 존재는 나만이 느끼는 깊은 애착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의 이 소품들도 크기나 값어치로 따지면 하챦게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들 가슴을 설레게 하는 아름다움의 결정结晶임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모두 귀한 신분을 지닌 이의 무덤에서 나온 배장품陪葬品들 이지만 안타깝게도 2~30년 전에는 골동시장 난 전에서 이리저리 굴러 다니다 값비싼 큰 기물을 사고 파는 자리 에서 가치도 없이 끼워주는 장난감에 불과했다. 나 역시 이것들을 얼마에 싼 건지 기억도 없다.
아마도 큰 작품 한두 점 흥정하며 싸잡아 주워온 물건이었을 것이다. 이제 와 무심코 씻고딲고 다시보니 금옥金玉보다 귀한 것을.. 참으로 간사한 게 인간의 감정이다. 예들이 그나마 내 손에 들지 않았으면 지금쯤 어찌 되었을까? 어느 이름모를 길바닥에 버려졌을지도 알수없는 운명..생각만 해도 썸뜩 하다.
중국도자문화 84회 촬영을 마치고 김덕기 박사님과 짧은 인터뷰를 했습니다. 말씀 가운데 박사님은 중화문명을 접한 세월이30여년이 되었는데 인류가 만든 예술품 중에서도 특히 이 천리마 한쌍을 볼 때마다 가슴이 떨리고 감격한다고 합니다. 중국 예술품에 관심 가진 분들에게 좋은 영상을 소개합니다.
당 삼채 천리마 해설(김덕기 박사)
내가 중화문명을 접한 세월이 30여년.
인류가 만든 예술품 앞 에서 이처럼 볼때마다 가슴을 떨며 감격한 작품 은 이 천리마 한쌍이 처음이다. 이 암수 두 종류의 骥馬 (기마: 천리마)는 필시 唐나라 전기의 황실이나 귀족의 무덤에 순장 했던 두번 다시 만날수 없는 희귀한 극품이다. 실물을 볼수없는 분은 영상이라도 다시 한번 살펴 보시라.
별일 없이 소일하며 다소 여유를 부리고 있는듯한 검은 말이 숫놈이고,사치 스런 치장으로 고개를 비껴 멋을 뽐내고 있는 흰말이 암놈이다. 동물이지만 성정을 짐작할 수 있으리만치 생동감이 넘친다.
자토瓷土가 아니고 도제로 빚은 당 삼채는 실제로 봉건사회의 순장殉葬 풍습을 종결 시킨 배장용 陪葬用 명기冥器로 중국 채자彩瓷의 시원이요 각종 동물과 인물 의 사실적인 아름다움을 구현한 조소雕塑의 전범典范이 되었다.
9월 13일 명가원에서 기획한 차연정담(茶緣情談) 첫 번째 차회가 열렸다. 향후 매월 정기적으로 차회를 연다.
회비: 7만원 (다음 차회에서 식사를 포함하면 10만원) 운영 방식: 차계의 인사를 초대하여 차에 대한 경험담을 듣고, 주인이 내는 차를 음미하는 시간. 차(茶): 1990년 말 중소차창 성공사 녹인 1996년 맹해차창 정품 등중등 7523 1950년대 문산포종 기남향 차
첫 번째 초대 손님 원충 스님: 경북 상주 보장선원 禪主, 일본 하나조노 대학에서 중국선종으로 박사학위 취득, 현재 동국대 대학원 선학과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차회 진행 원충 스님은 보이차 메니아로 차를 마시면서 좋아진 신체적인 특이점과, 스님 개인 취향의 차들에 대한 에피소드를 겸한 이야기에서 공감하는 분들과 대화가 지속되었다. 스님은 강성호 내비를 넣고 90년대 후반 차로 유통되는 차를 즐겨마시고 있고 선물용으로도 많이 사용하였다고 한다. 김경우 대표는 차를 내면서 설명을 하고 마시면서 참석자들과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다. .
처음 마신 성공사 녹인은 중소차창에서 만든 차로서 5-7등급의 모차를 병배하여 만든 차다., 1996년 맹해차창 정품 등중등 7532 보이차와 비교 해서 맛과 품질 특징에 대해 설명하였다. 특히 맹해차창 보이차의 가치에 대한 해설에서 노차를 취급하는 전문가의 견해를 새로운 시각에서 볼 수 있었다.
50년대 문산포종은 대만 타이페이에 있는 1868년 창립된 김덕중 노차포에서 소량 유통된 차로 설명을 듣고 시음하게 되었다. 나는 70년대 생산한 문산포종차는 보관 방식의 차이를 느낄 수 있을 만큼 다양하게 접해 보았지만, 그 이전에 만든 차는 처음 접하였다.
문산포종 노차는 환경이 좋은 곳에서 오랜 기간 보존이 잘 된 차다. 차 맛의 특징은 생기가 있으면서도 노차로서의 깊은 신맛이 뚜렷하고, 차를 마신 뒤에 올라오는 단침은 풍부하여 오래된 청차의 숨은 매력을 발견할 수 있다.
잠시 휴식 시간을 이용하여, 경주 황남빵보다 더 원조격이라고 하는 최영화 빵과 무화과, 청포도, 케익류 등이 준비되어 차마신 뒤의 허기감을 채울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기남향 차를 마시면서 최근 재배 침향의 동향에 대한 설명을 듣게 되었다.
현재 전국적으로 차회가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다. 대부분 중국과 대만에서 일어나는 좋은 내용들이 선별적으로 영향을 주고 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한국 차회의 방향도 조금씩 변화되고 정착되어가는 과정에 있다.
차를 마시기 위한 찻잔과 받침은 좀더 높은 단계의 차회에서 만날 수 있는 수준이기에 언젠가 환상의 조합을 기대하게 된다.
중국 원청화 전문가 장칭위(张庆玉) 선생 초청 강연과 도자기 감정을 이틀간 기록한 짧은 생각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강연 및 감정 시간:
중국 원청화 전문가 장칭위(장경옥 张庆玉) 선생과 명대, 청대 도자기 전문가 장치화(张其华) 선생을 초청하여 강연과 감정 시간을 가졌다.상인들이 가져온 도자기들은 모두 가짜로 판명되었지만, 가정 주부가 가져온 접시와 수저는 청대 초기와 중기의 진품으로 확인되었다. 또한, 개인 소장품인 찻잔 종류는 명대와 청대 수출용 자기로 판명되었다.
유익한 강의:
원나라 때의 청화에 대한 강의는 매우 유익했다. 도자기의 역사적 배경과 시대적 특성을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특히 문자 기록의 가치를 도편에서 하나하나 찾아낸 장칭의 선생의 저술 “원청화”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감정 과정의 배움:
도자기 감정 시간 동안, 감정인은 문양 하나하나에 담긴 역사적 진실과 시대적 배경을 설명하며 진품과 가품을 구별했다. 이 과정에서 감정인의 박식함과 겸손함을 배울 수 있었다.
이 경험을 통해 도자기의 진위 여부를 판단하는 과정과 그 속에 담긴 역사적 의미를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