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도 여행을 앞두고 부처님의 발자취를 더듬고 있습니다. 눈, 귀, 코, 혀, 피부에 닿는 멀쩡한 세상을 두고 환상이라고 합니다. 순간순간 펄떡이는 심장을 느끼고 있는 나를 두고 무아라니ᆢ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 삼법인 중도로 대표되는 부처님의 깨우침을 공부하지만 도무지 체득되지 않는 화두에 절망하는 날들입니다.
안근이 색경을 만나 안식으로 드러난 세상, 귀가 소리의 경계를 만나 들린다는 인식이 형성된 자리ᆢ 코, 입, 피부를 합친 오근이 의식으로 통합되고 색성향미촉이 법으로 통섭되어 펼쳐진 세상ᆢ 그 속 어디에도 나는 없습니다. 다만 나라고 불리는 연기하는 존재가 있어, 나 여기 있노라고 나 여기 멀쩡히 살아 있노라 웅변하고 있는 것이 우리네 삶입니다.
제행무상이기에 일체개고이고 제법무아라는 부처님의 깨달음을 이해했지만 열반적정의 경지는 요원하기만 합니다. 탐진치의 굴레를 벗어나려 몸부림치면 칠수록 한평생을 굴러온 습이 사사건건 앞길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사성제를 깨달아 팔정도를 실천하고 중도의 길을 가려 하지만 정견조차 바로 세우기 어렵습니다.

멍하이기지 3호 차밭에 앉아서 지금의 내가 아니, 나라고 불리는 존재가 살아왔던 세월을 돌아봅니다. 농촌에서도 제일 궁핍했던 집안에서 태어나 세상을 원망하며 이리저리 떠돌던 시절, 운명처럼 차를 만났고, 차업에 몸을 담은지 30년이 흘렀습니다. 나라는 존재의 기억 속에 꿈결처럼 펼쳐졌던 세상, 그 속으로 폭풍처럼 달려왔던 지난 세월이 어쩌지 못하는 삶을 지탱하고 있습니다.
아니아니ᆢ
아니야아니야ᆢ
체머리를 흔들며 60년을 버텨온 내가 이제는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정의는 무너졌습니다. 이제는 아무리 찾아봐도 나라고 생각하는 나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찰나찰나 가상공간 속에서 연기적으로 존재하는 그 무엇이 있을 뿐입니다.
어느 날 갠지스 강변에서 강물에 뜨 내려가는 통나무를 보신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저 통나무가 바다에 닿으려면 이쪽 저쪽 언덕에 걸리지 않고(집착), 가라앉지도 않고(탐욕), 붙잡히지도 않고(아만), 소용돌이에 휘말리지도 않고(쾌락), 속으로부터 썩지도 않으면(계율) 마침내 바다에(열반) 도달할 수 있다."
차밭에 앉아서 차나무를 봅니다. 중도의 바른길은 요원하기만 하고, 가을바람에 물결처럼 일렁이는 찻잎이 양심에게 묻습니다. 잘 가고 있는가? 아직도 들끓는 번뇌를 어쩌지 못해 쭈구려 앉아 돈 벌 궁리나 하고, 세파에 떠밀려 이리저리 부침하고 있지만, 침몰하지 않도록 나라는 존재를 지탱시켜 준 찻잎들이 눈물겹도록 고맙습니다. 아직도 중도의 흐름은 논리 속에 갇혀 있지만, 썩지 않는 차나무가 되어 다만 그렇게 그렇게 흘러 가겠습니다.
[아제생각]은 오운산 석가명차 최해철 대표가 맹해에서 전하는 소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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