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멍하이의 겨울 아침은 자욱한 안갯속에 밝아옵니다. 차실의 창가에 앉아 안개 사이로 서광처럼 다가오는 햇살을 받으며 한 잔의 차를 마십니다, 이 차가 내 입술에 닿기까지 많은 인연들의 노고가 있었음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1996년 '가시리잇고'라는 찻집을 오픈했습니다. 그리고 2014년 중국에 차업유한공사를 설립하고 차를 마시고 만들며 살아온 지 30년이 흘렀습니다. 봄날의 아지랑이, 작열하던 여름 태양, 가을의 낙조, 한 겨울 얼어붙던 햇살이 어떻게 찻잎에 새겨지는지 보고 싶었습니다. 바람에 흩날리는 야생화의 향기, 숲속에 내리는 비, 물결치는 산 안개가 어떻게 차 맛으로 수렴되는지 느끼고 싶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서로에게 의지하며 생멸합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연기와 중도의 진리를 저는 차를 만들면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계절의 변화에 호응하지 않으면 차나무의 균형은 무너지고 맛은 여물지 않습니다. 비가 너무 많아도, 너무 적어도, 햇볕은 뜨거워야 하지만 따가우면 안 되고, 바람은 불어야 하지만 때론 잠시 머물러 새싹이 움트는 걸 지켜봐 주어야 합니다. 인연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무상의 도리가 한 모금의 차 속에 있고 내 삶에도 그대로 이어짐을 알았습니다. 결국 좋은 차란 내 마음대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연들의 화합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을.
생각이란 감옥 속에서 저는 평생 들끓는 번뇌를 안고 살아가고 있지만 차나무는 언제나 그 자리에서 올곧은 잎을 피워 올립니다. 그리고 침묵의 언어로 매년, 매 계절 비슷한 질문들을 던집니다. 잎을 딸 때 욕심을 부리면 황편이 많아지고, 덖을 때 성급하면 향이 무너지고, 유념할 때 힘이 들어가면 탕색이 흐려집니다. 차를 만들며 저는 손끝의 감각으로 불안과 욕심을 내려놓는 법을 배웁니다. 유념이 끝난 찻잎을 햇살에 늘어놓을 때, 저는 내 속에서 새까맣게 꼬부라진 생각 또한 펼쳐 말립니다. 조바심이 평상심을 삼키면 차의 안정감이 무너집니다. 알 수 없는 것들을 무작정 기다리며 저는 마음의 속도와 자연의 속도가 다를 수 있음도 알았습니다. 결국 삶이란 나를 짓눌러 이겨내는 것이 아니라 인정하고 놓아주는 것임을 차는 다정히 속삭이고 있습니다.
겨울 안개는 물러가고 산허리를 넘어온 햇살이 차실의 동창으로 쏟아집니다. 초겨울 햇살이지만 어느 때보다 따뜻합니다. 뢰달산(원래의 명칭은 바위가 쉬는 산이란 뜻의 '루난산'입니다.) 단주차를 마시며 문득 고대 희랍의 철학자 디오게네스를 떠올립니다.
“내 햇볕을 가리지 말라”
햇볕을 가로막은 사람이 황제라 하더라도 지금의 따사로운 햇살을 가로막을 권리는 없습니다. 지금 손에 들고 있는 차한잔, 지금 몸속으로 들어가는 차한잔, 들이쉬고 내뱉는 호흡 속에서 살아 있는 차향기, 지금 나에게 소중한 것은 이것밖에 없습니다. 그 외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음을 알아가는 세월입니다.
그동안 차를 만들며 깨달은 것은 거창한 진리가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 단순해서 젊은 날에는 결코 믿을 수 없었던 것들입니다. 빛이 드는 날에는 빛 속에, 그늘이 드리운 날에는 그늘 속에서 그저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의 일들을 하며 살았습니다. 발버둥 치지 않아도 모든 것은 언젠가 모두 제 자리로 돌아갈 것입니다. 행복은 노력으로 쟁취하는 열매가 아니라 조건이 무르익으면 저절로 피어나는 향기 같은 것. 따스한 햇살 아래 한 잔의 차를 마시며 노곤한 몸이 졸음에 겨워합니다.

다시 한 모금의 차를 마십니다. 따스함이 목젖을 지나 가슴에 닿습니다. 오늘의 나에게 조용히 되뇝니다. 이번 계절도 잘 살았습니다. 바람도 있었고, 추위도 있었지만 한 잔의 차는 언제나 따스한 햇살처럼 나를 데워주었습니다. 그걸로 충분합니다. 차 만들기 인생 30년이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흘러간 것도, 디오게네스의 햇살을 다시 떠올리게 된 것도 모두 인연입니다. 보라! 따스한 햇살 아래 눈.귀.코.입.몸.의식이 차라는 대상을 만나 색.성.향.미.촉.법으로 춤을 춥니다.
*성탄 전야에 귀국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인연 닿는 님들께 따뜻한 차 한 잔 올리겠습니다.
[아제생각]은 오운산 석가명차 최해철 대표가 맹해에서 전하는 소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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