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흔히 건조한 환경이라 차가 익지 않는다는 말을 합니다. 그래서 고온다습한 환경에서 일정 기간 보관한 다음 한국으로 들여와 거풍시키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반면에 처음부터 밀봉하여 산화와 발효의 조건을 최대한 차단하여 보관하는 것이 좋다고 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한국에서 보관된 차가 고온다습한 환경에 노출된 차보다 느리게 변화하는 것은 것은 맞지만 한국에서 차가 익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서 제가 익는다고 표현한 것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면 발효와 산화가 진행된다는 것입니다. 한국도 장마철엔 고온다습하여 지구상 어디에나 있는 미생물이 작용하는 조건이 형성됩니다.
발효가 아니더라도 찻잎 자체 효소의 습열작용 등으로 산화가 촉진될 수도 있습니다. 다만 봄 가을은 건조한 편이라 느리게 변화하고 겨울에는 특별히 관리하지 않는 이상 변화가 중지되는 상태가 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겨울 한철 관리만 신경 쓴다면 한국이라고 사계절 내내 보이차가 익지 않는다는 논리는 성립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리고 비닐이나 알루미늄 등으로 밀봉하여 차를 보관해야 한다는 분들은 보이차의 진화를 찻잎 자체 효소에 의한 변화만으로 한정하는 것 같습니다. 일정 부분 수긍이 가는 부분도 있지만 현재 보이차 시장의 상황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주장이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보이차의 가치와 저변을 확대하는 새로운 주장은 언제나 열려 있어야 합니다.
옳고 그름으로 무조건 매도할 것이 아니라 보이차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가는 신선한 시도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목적을 가지고 사리사욕을 추구하는 불순한 논리가 아니라면 입창 차의 가치도 새롭게 조명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은 다소 생경한 논리들이지만 언젠가는 보이차의 지평을 넓혀주는 새로운 물결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와중에도 한국의 석가명차-오운산 본사 창고에서 보관되고 있는 차들은 매년 잘 익어가고 있습니다. 봄 가을엔 가끔 문을 열어 환기해 줄 뿐 특별히 관리하지 않습니다. 여름엔 천정의 선풍기를 가동하고, 겨울엔 몇 군데 전기 히터를 가동하여 가능하면 영상 10도 이하로는 내려가지 않게 합니다.
건창, 습창, 입창, 밀봉 등의 논란이 있지만 기호식품인 보이차의 선택은 언제나 소비자의 몫입니다. 홍콩 대만 광조우 등 과습한 창고에서 보관된 차를 선택할 수도 있고, 베이징 쿤밍 등 아주 건조한 지역에서 보관된 차를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사계절의 변화가 뚜렷한 한국에서 보관된 차를 더욱 선호할 수도 있습니다.
홍콩의 과습한 창고에서 어느 순간 불쑥 나온 노차가 현재 시장의 정점에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앞으로도 영원히 지속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최근에는 고수 햇차를 선호하는 사람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생산자는 자신의 이념에 맞는 차를 만들면 되고 유통업자 또한 자신이 맞는다고 생각하는 차를 판매하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선택은 소비자의 몫입니다.
생산자 유통업자가 아무리 억지로 차맛의 경계를 짓는다 할지라도 문화는 특정 집단이 어느 날 하루아침에 만들 수 없습니다. 기호식품인 차는 당연히 소비자들의 기호에 맞아야만 소비될 수 있습니다. 오늘도 자문해봅니다. 이런저런 논쟁을 뒤로하고 소비자들의 기호에 맞는 차, 맛있는 차, 좋은 차는 과연 어떤 차 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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